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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집회가서 이한열 열사가 느낀 감정 조금 느낌 이한열의 후손들이 짱깨만행에 침묵하면 안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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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래식독 2019. 12. 14.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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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장관이 사퇴 전에 발표한 검찰 개혁 방안, 그것이 어떤 것은 장관 훈령으로, 또 어떤 것은 시행령으로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야 되는데, 그중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것도 있고 또 앞으로 해야 될 과제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국무회의 의결까지 규정을 완결하는 절차 부분을 적어도 10월 중에 다 끝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라고, 이미 발표된 개혁 방안 외에도 추가적으로 어떤 개혁을 취하겠다고 생각하는 방안들이 있다면 또 법무·검찰개혁위원회에서도 추가적인 방안들을 제시할 테고, 검찰에서도 이런저런 개혁 방안을 스스로 내놓을 수도 있는데, 그런 부분들이





하고, 같이 고생하던 후배에게는 사과 한마디 없이 국회의원한테만 미안하냐고...우리같은 사람들은 아가 씨들 나오는 술집에서 양주마실 팔자가 안되니 나가서 소주나 먹자고.. . 그리고 나왔습니다. 모두 일어서는 순간 우상호가 테이불에 있던 양주의 병을 새로 따더군요. 그러거나 말거나 나왔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술을 한잔도 마시지 않았지만 계산대 로 갔습니다. 이미 정범구 박사가 계산을 했다고 하더군요. 저는 명세서를 조목조목 써달라고 했습니다. 양주 두병에 음료수, 안주가 서너가지로 22만 7천원이 나왔고, .양주 한병과 안주 한접시는 서비스였답니다. 저는 술집 아저씨한테 물었죠. 난



보상에 더욱 힘을 쏟을 것입니다. 숫자로만 남아있는 항쟁의 주역들과 피해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찾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할 것이며, 국가폭력 가해자들의 책임 소재도 철저히 규명하겠습니다. 이제 와서 문책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부는 작년 설립된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이 뿌리내려 부마민주항쟁의 정신이 꽃필 수 있도록 돕고, ‘부산 민주공원 기록관’과 ‘창원 민주주의



죽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탱크의 궤도 소리가 들려오던 전남도청의 마지막 밤, 시민군들은 도망치는 대신 애국가를 불렀다. 민간인들이 공수부대를 당해낼 수 있을 턱이 없었으므로, 광주시민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가망 없는 싸움에서 공화국 대한민국의 주권자로서 저항권을 행사하다 죽었다. 그렇게 1980년 서울의 봄은 광주의 피바다로 끝이 났다. 2019년, 홍콩. 손바닥만한 도시는 인민해방군 특수부대에게 둘러싸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광주와는 달리, 이번에는 도시 밖의 사람들도 스마트폰으로 도시의 소식을 듣는다. 한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시민참여주의 선진국인 대한민국의 신성한 학문의 전당인 대학교 교내에서 시진핑 개씹쌔끼 모택동 쳐죽일새끼 우상화 하는 짱깨 버러지 공산당 독재 전체주의 지지하는 개씨발 짱깨 씹새끼들이 설치긴 어딜 설쳐?! 제발좀 나가뒤져라 개씨발 짱깨새끼들아 홍콩시민들이 한국으로 귀화하고 정치적 망명이나 난민신청하면 받아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80년 광주와 87년 서울의 봄이 생각나네요 과거 우리나라의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모습이 현재 저 사진에 있는 홍콩 대학생들 모습이네요.. 국립구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열사 : 나라를



병무청에 지원한 훈련소입소 한달도 안남은 입영영장 전해받고 급작스런 송별회자리에서 동지들에게 미안하다며 눈 퉁퉁 부르트게 울던 당신들 덕에, 2019년 10월 5일 서초동 대검찰청앞 도로를 틀어막고 벌인 집회는 즐겁고 평화롭고 아름다웠습니다. 그시대의 노동자 농민 대학생 모두 먼저 싸워줘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 오늘은 오후 급작스런 집안일로 서초동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오전에 집을 나서버릴 껄, 밍기적대다가 꼬였다고 투덜거리며 실시간





같은 고등부 학생 누군가가 남의 집에 들어가 도둑질을 하다가 잡혔다. 장로였던 아버지가 도와주려 뭔가 노력했던 듯 하다. 그때 담임목사님 아들이 부장검사였던가 그랬다.집으로 오신 목사님이 아버지와 얘기하는 걸 들었다. 이 일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검사가 기소를 유예하는 것이라고 한다. 담당검사에게





했고, 최루탄 연기를 마셔야 했으며, 고문으로 장애를 얻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1980년 광주에서의 싸움은 전남도청의 피바다로 끝난 것이 아니라 1987년 백양로의 이한열의 피로 끝났다. 그 피로써 공화국은 다시 민주주의와 자유를 얻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광주는 빛고을이라는 이름 그대로, 우리에게 자유의 빛을 다시 밝혀 주었다. 7. 나는 하느님을 믿는 만큼이나 기적을 믿는다. 그래서



위해 가망 없는 싸움에서 공화국 대한민국의 주권자로서 저항권을 행사하다 죽었다. 그렇게 1980년 서울의 봄은 광주의 피바다로 끝이 났다. 2019년, 홍콩. 손바닥만한 도시는 인민해방군 특수부대에게 둘러싸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광주와는 달리, 이번에는 도시 밖의 사람들도 스마트폰으로 도시의 소식을 듣는다. 한 남자 대학생이 건물에서 떨어져 죽었으며 열여섯 살 소녀가 경찰들에게 강간당했고 한 여자 중학생은 바다에서 알몸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2019년’에 들려온다. 시위대는 진압군에게 양궁으로 화살을 쏘고, 진압군은 시위대에게



연습하던 빨갱이들. 최류탄에 눈물콧물 쏟아내고 백골단에 쫒기며 닭장차에 쳐박혀 어딘지도 모를 변두리 흙길에 두셋씩 버려졌던 데모꾼들. 당신들 덕분에 오늘 민주시민들은 그냥 앉아서 노래하며 즐겁게 시위 할 수 있습니다. 시위장소에 토끼같은 아이들도 데려가고 삼삼오오 간식도 나누고 촛불도 반짝이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유명한 가수 공연도 공짜로 즐기고. 꼰대들이 박터지게 싸워준 덕입니다. 먼저 싸워준 덕입니다. 집안망신시킨다며 본인도 모르는사이 가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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